초보 역사탐방러

익산 가볼만한 곳, 흥미로운 백제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왕궁리유적

북한산반달곰 2024. 11. 19. 17:26

안녕하세요. 북한산반달곰입니다.

 

백제 왕도라고 하면 주로 공주(웅진)와 부여(사비)가 먼저 생각나실 것 같고 좀 더 관심이 있는 분들은 위례성-지금의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을 떠올리실 것 같은데요. 익산에 백제의 또다른 왕도가 있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백제의 중흥을 꿈꿨던 30대 무왕의 혼과 기백이 담긴 익산 왕궁리유적이 바로 그곳입니다.

 

유적 소개

왕궁리유적은 백제 후기 궁궐의 구조와 기능, 축조과정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백제 무왕 시기에 왕궁으로 사용되었고 이후에는 사찰이 들어선 유적입니다. 2015년 7월에는 공주, 부여, 익산 지역의 7개 문화유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는데요. 보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 내용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왕궁면에 위치한 왕궁리유적은 백제 30대 무왕(600 ~ 641)대에 조성되어 그 후 사찰로 변화했다. 백제 말기 익산 경영과정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왕궁으로 사비(부여)와 함께 복도로 이해하고 있다. 백제 왕궁은 용화산에서 발원한 능선 끝자락의 낮은 구릉 위에 조성되었다. 1989년부터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내용에 의하면 백제 말기 왕궁으로 조성되어 일정기간 시용된 후 왕궁의 중요 건물을 철거하고 탑과 금당, 강당 등 사찰이 들어선 복합유적이다.

왕궁리유적의 왕궁은 백제왕궁으로서는 처음으로 왕궁의 외곽 담장과 내부구조가 확인되어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조성된 백제왕궁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유적이다. 왕궁의 외곽에는 폭 3m의 담장을 동서 245m, 남북 490m인 장방형으로 두르고 있다. 왕궁의 남측 절반은 국가의 중요 의례나 의식을 행하던 건물, 왕이 정사를 돌보던 건물, 왕과 왕의 가족의 생활을 위한 건물들이 4개의 동서석축을 쌓아 구분·배치하였다. 북측 절반은 왕의 휴식을 위한 공간인 정원과 후원, 왕궁의 서북측에는 백제시대 가장 귀중품인 금과 유리를 생산하던 공방지가 위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왕궁의 남측에 의례나 의식, 정무, 생활을 위한 공간을 배치하고, 북쪽에 후원을 배치하는 것은 고대 중국이나 일본 왕궁에서도 확인되고 있어서 당시 고대 동아시아 국가에 문화교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왕궁으로 일정 기간 사용한 후 사찰로 바뀌어 통일신라 후기까지 유지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사역 동남측 일부에서는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 출처 : 백제왕궁박물관

 

위치 및 주차

 

왕궁리유적
- 주소 : 전북 익산시 왕궁면 궁성로 666 왕궁리유적전시장
- 연락처 : 063-859-5875

 

 

왕궁리유적은 218,155㎡의 면적에 와적기단 건물지, 정원과 공방, 화장실 유적, 오층석탑과 금당 등 사찰 유적 등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입구에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백제왕궁박물관과 함께 자리하고 있어서 박물관을 먼저 둘러본 후 유적을 감상하시면 좋은데요. 백제왕궁박물관은 따로 포스팅하도록 하겠습니다.

 

왕궁 유적

박물관을 둘러보고 본격적으로 왕궁리유적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널찍한 공간에 건물지 등이 잘 정비되어 있고 잔디밭이 잘 조성되어 있어서 산책하기에도 좋은 곳입니다.

 

사실 삼국시대 등 고대사 유적들은 석탑 등 일부 유적을 제외하면 대부분 건물지의 형태로 확인할 수 밖에 없습니다. 1,000년도 훌쩍 지난 시기에 지어진 건물들이니 당연한 일이겠죠. 평지보다 도톰하게 정비해 놓은 건물지와 남아있는 주춧돌 등을 통해 예전의 모습들을 상상하면서 감상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습니다.

 

왕궁리유적에서는 왕의 거처와 중앙행정기구가 있는 곳을 의미하는 ‘수부(首府)’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백제의 왕궁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백제 왕궁으로는 처음으로 담장과 석축으로 구분된 내부구조가 확인된 유적이기도 합니다. 왕궁의 남쪽  절반에서는 정전으로 추측되는 대형 건물터, 국가의 주요 의례를 행했던 건물, 왕과 가족의 생활을 위한 건물들이 배치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사비시대에 부여와 익산 지역에서 유행하다 일본에까지 전파된 와적기단이 사용된 건물터도 볼 수 있습니다.

 

유적의 북쪽 절반에는 왕의 휴식을 위한 공간인 정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남쪽에 업무와 의례, 생활을 위한 시설을 배치하고 북쪽에 후원을 배치하는 형식은 고대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확인되고 있어 당시의 문화교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하네요.

정원 중심시설은 유리 건물을 둘러놓아서 관람이 가능하고 보존하기도 용이하게 해놓았습니다. 산과 폭포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고 특히 서쪽으로 1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는 중국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어린석도 2점이 발견되었다고 하네요. 더 자세한 설명은 아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궁궐을 앞, 뒤로 똑같이 나누면서 동서 방향으로 쌓은 4번째 축대의 동측 끝부분에 위치한 정원의 핵심 시설이다. 형태나 크기가 다양한 괴석이나 둥글거나 넓적한 강자갈돌로 화려하게 네모난 못이 만들어져 있다. 네모난 못으로 물이 들어오거나 나가는 수로와 함께 내부에서 물이 잘 다듬은 석재를 넘쳐 흘러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서쪽으로 약 1m 떨어진 지점에서 어린석 2점도 발견되었는데 형태는 둥그스름하면서 길쭉하며, 길이는 15~26cm이다. 어린석은 중국의 정원에 장식한 돌과 닮아 중국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축대의 앞, 뒤쪽 사이의 높이 차이를 활용하여 산과 폭포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표현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 출처 : 왕궁리유적 설명판

 

왕궁의 서북측에는 금과 유리를 생산하던 공방지도 위치해 있고 특히 삼국시대 유적 중에서는 처음으로 대형화장실 유적이 발견되어 흥미롭습니다. 이 화장실 유적은 왕궁에서 생활하던 이들이 사용한 공동화장실로 여겨지는데요. 구덩이 안의 오수가 일정한 높이로 차게 되면 수로를 통과하여 궁 밖으로 빠져나가는 위생적인 구조입니다. 발굴 당시 구덩이 안에서 참외 씨, 굴 껍데기, 뒤처리용 막대기와 회충과 편충의 알 등이 발견되어 화장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네요.

 

나무 옆쪽으로 가건물처럼 보이는 것이 화장실 유적이 있던 자리에 복원을 해놓은 모습입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여러 사람이 사용했던 화장실의 구조를 더 자세히 볼 수 있는데요. 안에는 볼 일 보는 사람 모형도 있어서 약간 미안하기도 했습니다ㅎ

 

대형화장실 유적 중에 한 곳은 수로의 구조를 볼 수 있게 해놓았는데 유리덮개 안쪽이 잘 보이지는 않더라구요. 그래도 안내판에 아래와 같이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궁궐의 북서쪽에 자리한 동서 방향의 돌로 만든 배수로에서 남쪽으로 약 11m 떨어져 있다. 서쪽에서부터 크기가 작아지는 3개의 대형화장실이 서-동 방향으로 나란하게 놓여 있는데, 이 중에서 가운데가 대형화장실 2이다. 모서리가 둥근 네모난 구덩이를 깊게 판 후에 안쪽 벽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기둥을 박아 만들었다. 규모는 동서 길이 5.6m, 남북 너비 1.6~2.1m, 깊이 2.00~2.35m이다. 나무기둥으로 구획된 내부공간의 규모는 정면 3칸 3.8m, 측면 1칸 0.8~0.9m이다. 서벽 중앙의 바닥면에서 90cm 위에서부터 북서쪽 방향으로 길게 늘어진 S자 형태로 부드럽게 꺾인 수로가 설치되어 있다. 대형화장실2는 구덩이에 담긴 오수를 모았다가 수로를 거쳐 정화시켜 궁궐 밖으로 빼내는 구조를 하고 있다.
- 출처 : 왕궁리유적 안내판

 

공방지는 좀 멀리 떨어져 있어서 화장실 유적까지 둘러보고 방향을 돌려 주차장 쪽으로 향했습니다. 왕궁리유적에는 성문이 있었던 서문터와 북문터, 후문터도 발견이 되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서문터를 지나게 됩니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 내용을 참고하세요.

 

서문 터는 궁궐 서쪽 담장의 남쪽 1/3이 되는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문이 있던 터는 궁궐 담장이 끊어진 상태로 알 수 있다. 이 터는 길이 8.9m, 너비 3m 정도가 남아 있다. 윗면을 잘 다듬은 원형 주춧돌 3개가 5.6m, 2.1m 간격으로 떨어져 있었다. 주춧돌이 놓인 상태로 보아 문은 중앙이 넓고, 양쪽이 좁은 구조이다. 규모는 정면 3칸(7.7m), 측면 2칸(4.2m)으로 추정하며, 주춧돌 아래에는 땅을 파고 널돌을 놓은 시설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안쪽에는 문의 경계를 이루는 단을 쌓았으며. 다듬은 돌로 만든 배수로가 있다.

 

사찰 유적

왕궁리유적은 일정 기간 궁으로 사용되다가 이후에는 사찰로 사용된 곳이라 사찰 유적들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찰의 건물인 금당과 강당지가 확인되었고  지금도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왕궁리 오층석탑이 대표적입니다. 오층석탑과 금당 터, 강당 터가 남북으로 일직선 상에 위치해 있어 1탑 1금당이라는 백제 사찰의 배치양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왕궁리 오층석탑은 미륵사지 석탑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백제 석탑의 우아한 모습이 완연하게 드러나고 해체 및 보수 과정에서 금강경판과 사리장엄구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더 자세한 설명은 아래 내용을 참고하세요.

 

탑은 사찰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이 석탑은 미륵사지 석탑을 본떠서 만든 백제계 석탑이다. 단층 기단, 얇고 넓은 지봉돌. 3단의 지붕돌 받침이 특징이다. 1965년부터 1966년까지 해체와 보수를 하였는데, 이때 1층 지붕돌 중앙과 기단에서 금강경판 19장, 금동제 사리함, 사리병 등 사리장엄구(국보 제128호)가 발견되었다. 또한. 석탑의 건물 기초는 가로 16.8m, 세로 12.7m 크기인데, 흙을 다져 메운 판축 기법을 사용한 점으로 보아 이 석탑은 본디 목탑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석탑 주변에서 '왕궁사, '관궁사'. '대관관사', '대관궁사' 라는 글자가 새겨진 통일신라시대 기와가 발견되어 탑이 세워진 시기를 놓고 '백제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초기등 여러 견해가 있다.
- 출처 : 왕궁리유적 안내판

 

오층석탑 뒤쪽으로는 금당이 있었던 건물터가 남아 있고 그 뒤쪽으로는 강당 터가 위치해 있어 1탑 1금당 양식 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화장실 유적 근처에서 바라본 왕궁리유적의 모습입니다. 11월 초에 갔었는데 하늘이 완전 가을하늘이라 마치 윈도우 바탕화면 같은 풍경이네요. 왕궁리유적은 늦가을 정취를 즐기기에도 좋지만 벚꽃 명소이기도 해서 봄나들이 장소로도 좋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백제 역사도 만나고 봄, 가을의 정취를 즐기며 산책도 할 수 있는 왕궁리유적, 익산 여행에서 꼭 가볼만한 곳으로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