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 수도인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은 웅진성에서 항복합니다. 그리고 나당 연합군의 주연에 참석해 무열왕과 소정방에게 술을 올리는 등 수모를 겪게 돼죠. 이후 소정방이 회군할 때 왕자와 대신, 주민 12,000 여명과 함께 당나라로 압송됩니다. 나라 잃은 왕으로서의 슬픔과 자책감 때문인지 의자왕은 당나라로 끌려간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타국 땅에서 눈을 감습니다.
의자왕은 당 고종의 명에 따라 낙양 북망산에 손호와 진숙보의 무덤 옆에 묻히게 되는데요. 손호와 진숙보는 폭정과 주색, 사치와 방종으로 나라를 잃은 오나라와 진나라의 군주입니다. 이역만리 타국 땅에 묻힌 의자왕은 죽어서도 수모를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죠.
의자왕은 패망 군주라는 이유로 백제를 망친 왕이라고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당대의 기록을 보면 의자왕의 평판과 치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신라를 여러 차례 공격해 영토를 확장하는 등 업적이 많았다고 하죠.
그런데 이레적으로 혹평을 받는 것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자신들의 정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의자왕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등 후대에 들어서 의도적으로 평가절하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삼천궁녀 이야기를 들 수 있겠구요. 지금이라도 의자왕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진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부여 왕릉원에는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의 가묘인 의자왕단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부여군은 중국 낙양시와 함께 1995년부터 의자왕 무덤을 찾기 시작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지난 2000년, 의자왕의 묘로 추정되는 곳의 흙을 가져다 이 곳에 가묘를 만들었습니다. 의자왕은 우리나라 최초로 타국에서 숨을 거둔 왕이라고 하는데요. 의자왕단 앞에 서면 죽어서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의자왕의 애처로운 마음이 지금까지 전해져오는 것 같습니다.
태자인 부여융의 묘지석은 1920년 북망산에서 출토되어 연구자료로 활용되고 있는데요. 의자왕의 묘지와 묘지석도 발견되어서 백제 마지막 역사의 모습들이 알려지고 역사적 재평가가 이뤄져 의자왕의 혼이나마 달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https://youtu.be/2rO-J1SVxWU?si=fDEA8-1P4IZ-jBX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