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권 제23 백제본기 제1, 온조왕 조
백제가 건국되고 온조왕이 즉위하다 (기원전 18년)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라 하였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건너편 고을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서기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어서 위례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
후에 내려 올 때에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그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은 그 아버지는 우태로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로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이었다.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 건소 2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으며,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위업을 도와주었으니,
어머니의 조력과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 곳을 선택하여 별도로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라 하고,
마침내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을 구이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
- 다음 : 온조왕 원년~13년(기원전 18년~기원전 6년)
반달곰이 읽어주는 삼국사기, 온조왕 원년~13년(기원전 18년~기원전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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